성 요한 드 브레뵈프(Saint John de Brébeuf, 10.19., 1593-1649)

성소실
2023.10.21 14:22 268 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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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6.21. 시복(교황 비오 11세)

-     1930.6.29. 시성(교황 비오 11세)

-     캐나다의 수호성인

-     별칭: 휴런(Huron)의 사도

 

요한 드 브레뵈프(1593-1649)는 1626년 휴로니아에 파견된 첫번째 예수회 선교사이며 인디언 말을 유창하게 하였다. 그는 선교 전초기지를 세우고, 수천명을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시켰으며, 수많은 예수회원들이 누벨 프랑스의 선교에 자원하는 것에 큰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크고 단단한 체격과 온화한 성품, 커다란 배포를 지닌 그는 휴런의 사도로 알려졌다.

 

브레뵈프는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태어났으며, 대학 공부를 마친 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겸손한 성품 덕에 그는 평수사가 되기를 청했지만, 그의 장상은 사제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를 하도록 그를 설득했다. 그는 루앙의 중등 교육기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622년 2월 19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같은 해 그는 대학 재무의 일도 함께 맡게 되었다. 2년 뒤,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이 예수회원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복음화를 위해 다른 수도회들의 도움을 구하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요청에 응답하여 북미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네 명의 다른 예수회원들과 함께 1625년 6월 19일 퀘벡에 도착했다. 휴런족이 퀘벡에 도착하기까지 그는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몽타네 지역의 원주민들의 사냥을 위한 탐험에 함께 하였다. 젊은 프랑스 사제였던 그는 그러한 방식으로 원주민들의 음식과 여정에 적응해갔다.

 

여름이 되자 휴런족의 원주민들이 물물교환을 위해 카프 드라 빅투아르로 왔다. 브레뵈프와 다른 예수회원 한 명, 그리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원 한 명은 그들을 만나러 갔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함께 갈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청했다. 휴런족은 다른 두 명의 선교사들은 기꺼이 데려가려했으나, 그들보다 건장하고 카누에 태우기에 너무 덩치가 커보이는 브레뵈프는 데려가고 싶어하지 않아 했다. 그들은 브레뵈프를 태워 이동하는 것에 많은 힘이 들 것을 염려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많은 선물을 제공함으로써 그러한 염려를 잠재웠고, 원주민들은 브레뵈프가 카누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조건으로 함께하는 것을 허락했다. 1626년 7월 26일, 그렇게 브레뵈프는 휴로니아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들이 폭포와 같이 수상 이동이 불가능한 지형을 만나 자신들의 짐과 카누를 육로로 옮겨야 했을 때, 강인한 체격과 힘을 가진 브레뵈프는 원주민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브레뵈프에게 “짐을 나르는 사람”이라는 뜻의 “에콘(Echon)”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8월말 휴로니아에 도착한 일행은 휴론의 곰 부족이 사는 마을 토안체에 정착했다. 브레뵈프는 가장 먼저 휴론의 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언어와 함께 원주민들의 관습과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2년여의 시간을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언어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휴런 문법책과 숙어집을 만들고, 교리를 번역했다. 그의 언어에 대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톨릭 신앙으로의 개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628년 겨울에 있었던 개종자는 임종을 앞둔 사람들 뿐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끝낸 후, 브레뵈프를 포함한 프랑스인들은 모두 프랑스로 돌려보내졌기에 그의 선교활동은 잠시 중단되었다. 영국의 봉쇄조치로 프랑스는 식민지로 보급을 할 수 없었고, 브레뵈프는 20대의 카누로 식량을 날라 1629년 7월 17일 퀘벡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하고 이틀 뒤,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그는 다른 프랑스 선교사들과 함께 추방되었다.

 

2년동안 브레뵈프는 루앙 대학에서 사도직 활동을 하였지만, 영국과의 조약으로 프랑스의 지역이 회복되자 최대한 빠르게 그는 다시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는 1633년 5월 퀘벡에 도착했으나, 휴런족이 여름에 오기까지 휴로니아로 가지 못했다. 그해 여름, 휴런족은 언제나처럼 100여척의 카누를 가지고 오지 않고, 11척의 소규모 행단만을 이끌고 퀘벡으로 왔다. 휴런족은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었기에 선교사들까지 함께 데려갈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브레뵈프와 앙투안 다니엘 신부는 그들을 설득하여 함께 그들의 보금자리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두 선교사는 다른 배를 타고 이동하였고, Taendeuiata라는 마을에서 휴런족을 만날 수 있었다. 원주민들은 브레뵈프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을 기뻐하며 그가 돌아온 것을 환영해주었다. 그는 마을 어귀에 세명의 사제와 다섯명의 평신도 협력자들이 머물 오두막을 짓고, 선교 공동체를 만들었다. 브레뵈프는 다른 이들에게 휴론족의 언어와 관습을 가르쳤다. 1635년, 그와 다니엘은 선교활동을 시작하였고, 낮에는 아이들을, 밤에는 성인들에게 선교활동을 하였다. 1년여의 선교활동의 노력 끝에, 죽음을 앞둔 4명의 유아와 8명의 성인, 12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브레뵈프가 처한 현실은 그리스도교와 토착 종교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의 상황이었다. 가뭄이 올 때면, 토착 종교 지도자들은 사제관의 십자가 탓을 했다. 예수회원들은 9일기도와 행렬을 통해 그러한 비난에 맞섰다. 기도를 할 때 비가오면, 예수회원들은 그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여겼다. 1636년 이사악 조그 신부가 도착했을 때, 예수회원들과 협력자들에게 천연두가 돌았고, 그것이 휴런족 마을로 옮아갔다. 이 병은 겨울 내내 돌았고, 예수회원들은 죽음의 문턱에 있는 천여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회원들이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전염병을 퍼뜨렸다며 그들을 비난했다. 브레뵈프가 오소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족장 회의에서 전염병이 종식되지 않는 이유로서 그를 지목했고, 그를 죽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결론은 1640년 3월에 열린 휴론 부족 회의에서도 같았는데, 이 때의 대상은 모든 예수회 선교사들까지 확대되었다.

 

브레뵈프는 선교 본부가 있는 생트 마리로 가서 중립적 성향의 다른 부족들과 함께 일했다. 그러나 그가 휴런의 적대 부족인 이로쿼이의 세네카와 모의를 꾸미고 있다는 오해를 받으면서 퀘벡으로 가서 몸을 피해야만 했다. 1641년 6월부터 1644년 8월까지, 그는 선교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생트 마리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로쿼이 족으로 인한 위험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 무렵 이사악 조그와 앙투안 다니엘 신부는 이미 순교했다. 1648년 9월, 가브리엘 라망 신부가 선교에 합류했다. 1649년 3월 15일 브레뵈프와 랄망은 주간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생트 마리를 떠났고, 생 루이스 마을에서 밤을 보냈다. 그날 밤 이로쿼이 족이 인근 마을을 습격했고, 휴런족은 여성들과 아이들을 마을 밖으로 내보내 숲에 숨겼다. 두 예수회원은 남자들과 함께 남기로 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다음날 여명이 밝아올 무렵, 이로쿼이는 울타리를 넘어 몰려와서 휴런족을 포로로 붙잡았다. 휴런족을 배신하고 이로쿼이에 붙은 이는 이로쿼이족에게 그들이 예수회의 마법사 중에 가장 강력한 에콘을 잡았다고 알렸다.

 

이로쿼이는 약간의 고문을 가한 후에, 포로로 잡힌 예수회원들과 휴런족의 원주민들을 발가벗겨서 다른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근처의 마을까지 눈을 헤치고 달려가게 만들었다. 포로들은 사람들 사이에게 집중 공격을 당하였고, 두명의 예수회원들은 그들이 죽임당한 두개의 말뚝으로 끌려갔다. 이로쿼이는 불에 달군 도끼를 브레뵈프의 어깨에 얹었다. 그가 살려달라며 소리지르지 않자, 그를 진액이 있는 나무 껍질로 덮어 불태웠다. 그는 여전히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인함을 잃지 않도록 독려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그의 코를 잘라내고 그의 목구멍으로 달궈진 쇠를 집어넣어 말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세례의 모습을 조롱하기 위에 그의 머리에 끓는 물을 부었고, 두피를 벗겼으며, 발을 자르고, 심장을 도려냈다. 그는 4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삶의 20년을 누벨 프랑스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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