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요한 파우스티 사제 순교자[예수회 고유전례력(9.2)]
본문
복자 요한 파우스티 사제 순교자(Blessed Giovanni Fausti, 1899-1946)
[예수회 고유전례력 - 복자 야고보 본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복자 요셉 앵베르와 복자 장 니콜라 코드디에 사제 순교자, 복자 토마스 시타르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복자 요한 파우스티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9.2.)]
2016.11.5. 시복(교황 프란치스코)
요한 파우스티는 1899년 10월 9일 발 트롬피아에 있는 마르체노의 브로조에서 안토니오 파우스티와 마리아 시골리니 사이의 12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신심 깊고, 남을 돕는 따뜻한 성품을 지닌 이들이었다. 행복하고 평온한 유년기 동안, 그의 사제 성소가 자라났고, 10살에는 브레시아 교구 신학교에 입학했다. 브레시아 신학교에서 그는 훗날 성인품에 오른 교황 바오로 6세가 된, 지오반니 바띠스타 몬티니와 함께 공부하였다. 1922년 7월 9일 그는 사제품을 받았고, 로마의 그레고리오 교황청립 대학을 졸업하였다. 이듬해 그는 브레시아 신학교의 철학 교수가 되었다.
1924년, 요한 파우스티는 고리치아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슈코더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어려운 알바니아어를 빠르게 배워나갔고,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진중하고 실질적인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이슬람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공부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의 기간에는 이러한 주제에 관하여 “치빌타 카톨리카”에 기고문을 연재하였으며, 이 글들은 후에 “가톨릭 사상으로 비추어 본 이슬람”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점을 이어 나가, 그는 이탈리아와 외국에 두루 퍼져있는 “동방의 이슬람 친구들”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1932년, 그는 이탈리아의 만토바로 파견되어, 그곳의 철학 교수의 소임과 예수회 공동체 원장의 소임을 수행하였다. 만토바에 있는 동안, 결핵 증상이 나타났는데, 이는 이미 알바니아에 있을 때부터 경미하게 가지고 있던 증상이었다. 이에 따라, 1933년 8월부터 1936년까지, 그는 알토 아디제를 시작으로 스위스의 다보스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그 병에 대한 장기간의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1936년 초, 그해 2월 2일 그가 장엄 서원을 발한 바레세 주의 밀라노 교구에 있는 갈라라테의 “알로이시아눔”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갈라라테에서 그는 6년을 지냈는데, 그동안 그는 탁월한 교수법과 지적 역량을 보여줬다. 같은 기간 그는 “추상화 이론”이라는 책을 저술했고, 이는 그가 선종한 뒤 1947년에 출판되었다.
파우스티가 가진 은사와 덕성을 알아본 예수회 장상들은 1942년 그에게 매우 정교하고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임무를 맡기기로 하였다. 그 소임은 알바니아의 교황청립 슈코더 신학교와 하비에르 대학에서 Rector 일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한해 뒤, 1943년에 그는 자기 소임을 알바니아 예수회원인 다니엘 다자니 신부에게 인계하였다.
그 후 그는 티라나로 옮겨가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 속에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그리고 이탈리아인과 알바니아인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것에 힘썼다. 그 역시도 독일군의 총탄에 폐를 관통당하고, 쇄골이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다.
1944년 말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하여, 독일군이 철수한 곳에 엔베르 호자가 지휘하는 극렬 공산당이 권력을 잡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갖은 폭력을 자행하였다. 그들은 특히 주교와 프란치스코회, 그리고 예수회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였는데, 이는 예수회원이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서 국가 지배 계급 문화, 특히 북부의 지배 계급 문화 형성에 기여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요한 파우스티의 사려 깊은 성품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장상들은, 1945년 그를 알바니아 예수회 관구의 부관구장으로 임명하였다.
12월에는, 신학생 중 한명인 프랑 가시가 비밀 경찰 시구리미에 의해 고문 받은 후 죽었다. 12월 31일 파우스티는 다니엘 다자니 신부와 함께 그 청년의 마을에 방문하여 미사를 드렸고, 같은 날 저녁 슈코더로 돌아오자마자, 두 신부는 체포되었다.
요한 파우스티는 두달동안 독방에 갇혔고, 그 후에도 고문은 계속되었다. 그들에게는 알바니아의 반란 선동과 바티칸 첩자라는 혐의가 씌워졌다. 사실 이는 마크 주니와 그르지 비치라는 신학생들이 공산주의 선전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전단에 자신들 임의로 도용한 이름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감옥에서 재판을 받으러 갈 때마다, 요한 파우스티는 심한 모욕을 당했는데, 이를테면, 한 여성은 격양된 목소리로 그의 앞에서 “이마에 총알을 박아라!”라고 소리치며 그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파우스티는 단지 “하느님, 그녀를 용서해주소서. 그녀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를 뿐입니다.”하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그 모욕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1946년 2월 22일, 공개 재판이 끝난 후, 판결문이 읽혀졌는데, 그존 슐라크 신부, 요한 파우스티 신부, 다니엘 다자니 신부와 신학생 마크 주니, 그르지 비치, 평신도 젤로쉬 롤라시, 프랑 미라카즈, 케림 사디쿠 등 8명에 대해서는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다른 이들은 징역형이 선고되었는데, 아주 작은 혐의만 있어도 5년형에서 종신형까지 무거운 형량이 선고되었다. 그르지 비치의 경우에는 이후에 강제 노동형으로 감형되었으나, 프랑 미라카즈는 1946년 9월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6년 3월 4일 새벽, 다른 6명은 슈코더의 바레자트 에 르마짓 가톨릭 공동묘지로 옮겨져 처형당했다. 아침 6시, 기관총 소대의 8명의 군인들에게 “발포”명령이 내려졌다.
요한 파우스티는 “나는 내게 주어진 소임들을 완수하고 죽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예수회의 형제들에게, 그리고 대주교님께 나의 인사를 전해주세요. 그리스도왕 만세!”라는 유언을 남기며 순교하였다.
2016년 11월 5일, 슈코더 성 스테파노 대성당 광장에서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의 주례로 그들의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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