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율리아노 모느와르 사제 [예수회 고유 전례력 - 유럽 여러 지방의 대중 순회 선교사 기념일(7.2)]

성소실
2023.07.07 17:15 19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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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일: 128

-     1951.5.20. 시복(교황 비오 12)

 

율리아노 모느와르(1606-1683)는 캐나다 선교를 꿈꾸며 예수회에 입회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소명은 그의 고향인 북부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역의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느와르는 Saint-George-de-Reintembault라는 작은 마을에서 1606년 태어나, 렌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중국, 일본, 캐나다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학했다. 이후 그는 1625년 예수회에 입회했는데, 그의 연학 동료 중에는 성 이사악 조그, 성 가브리엘 랄망을 포함한 선교사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모느와르의 길은 선교사의 길이 아니라 양성 과정에서 구사하기 어려운 브르타뉴어로 설교하는 법을 배워 브르타뉴의 사람들에게 향하는 길이었다. 그는 팔 일부가 괴사함으로써 거의 죽을뻔한 후에 해외 선교를 가지 않는 그 길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이 그 병에서 회복된다면 브르타뉴에서 설교하며 일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것이다. 그의 병세는 빠르게 회복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고, 마침내 1637년 서품을 받을 수 있었다.

 

공부를 마친 그는 캥페르로 갔고, 그곳에서 지병으로 은퇴한 브르타뉴 남부 지역의 순회 선교사였던 미셸 르 노블렛츠 신부를 만났다. 모느와르는 브르타뉴반도의 가난하고 힘든 노동에 시달리는 소작농들과 어부들에게 르 노블렛츠 신부가 사용했던 방법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피에르 베르나르 신부와 함께, 모느와르는 본토의 수많은 도시와 마을을 방문한 것은 물론 연안의 섬들도 방문했다. 그 섬들의 일부는 수년간 사제의 방문이 전혀 없었던 곳도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주로 4~5주간의 기간 동안 머물면서 올바른 교리의 기초를 다지도록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애, 칠죄종, 핵심적인 신학 등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도표를 이용하였다. 또한 노블렛츠 신부에게 배운 찬송가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모느와르는 선교활동 중에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이 선교 활동들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모느와르가 브르타뉴 지역을 순회한 43년의 세월 동안, 그는 대략 400회 정도의 순회 선교를 하였다. 때로는 몇몇 본당에서 적게는 만 명, 많게는 3만 명의 신자들이 그의 순회 선교를 찾아오기도 하였다. 본당 사제들도 그를 도와 고해를 듣거나 교리를 가르쳤고, 그들 중 모느와르를 영적 지도자로 삼아 계속해서 그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주교에게 청하는 사제들도 있었다. 1683년까지 거의 천여 명의 브르타뉴 선교사들이 이 일을 계속해서 함께 했다.

 

모느와르는 나이가 들면서 선교활동을 나가는 횟수가 줄여야 했다. 어느 날 그는 선교를 나가는 길에 그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아챘다. 동료 예수회원은 그가 플레빙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는 그곳에서 폐렴에 걸려 병상에 누웠다. 몇 주 후에 그는 죽음을 맞이했고, 주교는 그의 시신을 주교좌 성당에 모시고자 하였음에도 사람들은 본당에 모실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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