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데 예로니모 사제 [예수회 고유 전례력 - 유럽 여러 지방의 대중 순회 선교사 기념일(7.2)]

성소실
2023.07.07 17:14 20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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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일: 511

-     1806.5.2. 시복(교황 비오 7)

-     1839.5.26. 시성(교황 그레고리우스 16)

 

프란치스코 예로니모(1642-1716)는 그가 태어난 곳인 남부 이탈리아의 타란토를 멀리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에 비해 그의 나폴리에서의 사도직 활동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예로니모는 11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10살 무렵 테아티노회에서 생활하며 공부하였다. 그는 또한 변방 지역 마을에 포교 활동을 나가는 테아티노회원들과 함께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사제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타란토의 예수회 학교에서 고전, 철학 등을 공부했으며, 나폴리의 예수회 대학으로 옮겨가 민법과 교회법을 공부하였다. 예수회는 그를 그 학교에서 공부하는 이탈리아 귀족 자녀들의 교정 담당관으로 고용했다. 수년 동안 예수회와 인연을 맺은 그는 마침내 1670 28살의 나이로 수련원에 입회하였다.

 

젊은 사제 예로니모는 1년 만에 수련기 과정을 마치고, 선교활동을 하고 피정을 동반하는 다른 예수회원들을 돕기 위해 레체 교구로 파견되었다. 그는 1676년 봄에 있을, 그의 신학 종합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몇 년 후에 다시 나폴리로 돌아왔다. 그가 맡게 된 첫 번째 소임은 그가 평생을 헌신했던 나폴리 선교였다. 그는 이 임무에 40년 동안 봉사하였다. 그는 제수 성당 지하 경당에서 만난 수공업자들과 신심 단체를 만들면서 활동하였다. 또한 도심 광장에서 선교하였고, 북적이는 도로에서 매월 성체를 영할 것을 사람들에게 권고하였다. 한편, 그는 항만 갤리선의 노예들과 수감자들을 방문했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그들을 돌보았다. 또한 밤낮으로 병든 이들을 찾아 함께했다.

 

예로니모는 그의 사도직 초창기에 큰 열매를 얻기도 하였지만, 사람들로부터 질투와 시기 때문에 모함받아 사도직 활동에 큰 제약이 있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거리에서 설교하며 죄수들과 함께하는 그 사제가 완덕을 추구하는 사제들과 수녀들에게 피정을 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주교는 예로니모에 대한 비난들이 그에 대한 시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까지, 그가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다. 대주교는 마침내 예로니모의 성무 집행 자격을 되돌려 주었다. 한편, 예수회 장상들 역시 예로니모의 활동을 제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가 공동체 생활에 너무 적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관구장은 마침내 마음이 누그러졌고, 나폴리에서 예로니모의 자유로운 사도직 활동을 허용해 주었다. 예로니모는 이후 1694년부터 1702년까지 그곳에서 사도직 활동을 하였다. 이때 그는 절반 이상의 시간을 나폴리 외곽의 선교활동을 위해 헌신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소박하고 진정성 있는 설교에 감화되었다. 그의 일생 마지막 두 달은 늑막염으로 병상에서 서서히 쇠약해졌고, 예수회와 함께한 지 46년 만인 74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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