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 사제 [예수회 고유 전례력 - 유럽 여러 지방의 대중 순회 선교사 기념일(7.2)]

성소실
2023.07.05 17:11 21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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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일: 1231

-     1716.5.18. 시복(교황 클레멘스 11)

-     1737.4.5. 시성(교황 클레멘스 12)

 

요한 프란시스 레지스(1597-1640)는 칼뱅파와 가톨릭 사이의 내전 이후로 황폐해진 프랑스에서 방치되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남프랑스 대부분 지역은 성당을 파괴하고 가톨릭 사제들을 살해한 위그노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레지스와 같은 가정 선교사들은 한때 굳건했던 신자들의 믿음을 다시 불붙이는 소명을 수행하였다.

 

레지스는 1597 1 31일 남프랑스의 퐁쿠베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1616년 툴루즈의 수련원에 입회하였고, 인문학, 철학,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의 첫 번째 소임은 파미에의 예수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1632년에는 주교를 도와 신자들의 신앙심을 키우기 위한 일을 하도록 몽필리에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가정 선교사로 있으면서, 그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다. 주교의 요청으로 그는 비비에로 파견되었고, 그의 남겨진 짧은 삶은 언제나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자들을 찾아가는 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특히 겨울과 같은 이동이 매우 어려운 시기에도 험난한 산악지역의 이 마을 저 마을을 걸어 다니며 신자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는 그 지역의 본당에서 며칠씩 머물면서 간결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신심 깊은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있는 설교를 하곤 했다. 마을마다 고해를 주고, 미사를 집전하며,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또한 수감자들을 방문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옷과 음식을 모아주기도 하였다.

 

1640 12월 중순, 몽트리가드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그는 자신이 곧 임종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예감하여서 하던 일을 멈추고 르 퓌의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기 죽음을 준비하고자 3일간의 피정을 하고 총고해하였다. 그 후에 그는 동료인 클로드 비도 수사와 다시 몽트리가드로 돌아가 남은 선교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12 23, 그 둘은 다음 선교활동지인 랄루벡을 향하여 출발하였지만, 한겨울의 폭풍 앞에 그들은 눈 속에서 길을 잃은 채, 폐허가 된 판잣집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들은 랄루벡에 도착하여 그들을 기다리는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레지스는 잠시 허기를 채우고 휴식을 취할 새도 없이, 설교를 시작하였고, 고해를 듣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고해하고자 너무도 많은 사람이 몰려왔기에, 그는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까지 쉴 수가 없었다. 주님 성탄 대축일과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고해를 들었다. 몰려드는 군중 때문에 그는 깨진 유리창으로 찬 바람이 몰아치는 제의실에서 고해를 들어야만 했다. 오후 늦게 그는 갑작스레 기력을 잃고 쓰러졌다. 침상에 눕혀져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고해하고자 그를 찾아왔다. 그는 의식을 되찾았지만, 의사는 그가 폐렴에 걸렸다고 진단하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레지스는 12 31일까지 계속해서 기도하였고, 이내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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