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드레아 보볼라 사제 순교자

성소실
2024.05.20 11:16 9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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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 보볼라 사제 순교자(Andrew Bobola, 1597-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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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와바르샤바대교구수호성인

-     1853.10.30. 시복(교황 비오 9세)

-     1938.4.17. 시성(교황 비오 11세)

 

안드레아 보볼라는 17세기 중반 폴란드와 러시아 군의 무력 충돌의 일부로서, 가톨릭과 정교회의 갈등 속에서 순교하였다. 코사크(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서 러시아 정교회를 따르는 군사적 약탈 집단)는 가톨릭 신앙을 굳건히 옹호하고 지키는 그를 잔혹하게 학살하였지만,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믿음을 꺾지는 못하였다.

 

그는 폴란드 남부의 하층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예수회 학교에서 수학했고, 1611년 예수회 수련원에 입회하였다. 빌뉴스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냐스비주의 예수회 본당에서 사도직 활동을 하였고, 이때 많은 이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이끌었다. 2년 후 빌뉴스로 돌아온 그는 16년 동안 활동하면서 탁월한 설교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협력자들과 함께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는 단체를 조직하여 봉사하기도 하였다. 협력자들과 보볼라는 빌뉴스에 두 번이나 흑사병이 창궐한 때에도 영웅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630년 보볼라는 폴란드 동부의 브로뷔스크로 파견되었는데, 그곳 주민 대다수는 정교회 신자였고, 성당과 사제의 부족으로 많은 가톨릭 신자 역시 그들의 신앙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보볼라는 여러 도시에서 다양한 일을 수행했지만, 건강이 악화하여 다시 빌뉴스로 돌아왔다.

 

당시 보볼라가 활동하였던 지역은 1596년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정을 통해 정교회와 가톨릭의 갈등을 완화하고, 두 종교가 공존할 수 있기를 시도하였지만, 불행하게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코사크 무장세력에게 합류하여 가톨릭을 몰아내려는 정교회 신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1655년 오늘날 벨라루스 지방의 거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같은 시기에 러시아와 폴란드는 전쟁 중이었다. 1655년 8월 8일, 차르의 군대는 빌뉴스까지 진군하여 도시를 약탈하였다. 보볼라는 핀스크로 가서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도록 신자들을 독려하였지만, 이는 종교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보볼라가 거리를 걸을 때, 그를 괴롭히기도 하였다. 2년 후 코사크는 핀스크를 점령하였고, 이에 따라 가톨릭 신자들과 폴란드인들은 숲으로 피신하여야 했다. 코사크는 야노우까지 쳐들어와 가톨릭 신자들과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보볼라는 그 근처의 다른 마을에 있었는데, 몇몇 사람들의 밀고로 코사크에 붙잡혔다.

 

코사크는 보볼라에게 가장 먼저 배교를 강요하였다. 보볼라가 이를 거부하자, 그의 옷을 벗기고 나무에 매달아 잔인하게 그를 채찍질하였다. 그의 신앙을 조롱하며 가시관을 씌우고, 그의 살해 장소인 정육점까지 그를 끌고 갔다. 코사크는 계속해서 그가 배교를 거부하자 그를 정육점 탁자 위에 올려 잔혹하게 고문하고, 가슴과 등의 피부를 도려내고, 손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고, 끝내 코사크는 그의 심장에 송곳을 박고, 발을 묶은 채 군도로 내려쳐 죽였다.

 

그가 죽임을 당할 무렵, 폴란드 군이 야노우에 도착하여 그를 구하려고 했으나 이미 시간이 늦은 뒤였다. 그들은 보볼라의 시신을 수습하여 핀스크의 예수회 성당 지하에 모셨다. 그의 유해는 후에 모스크바로 옮겨졌다가 1923년이 되어서야 폴란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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