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도미닉 콜린즈 순교자(BLESSED DOMINIC COLLINS, 1566-1602)
본문
- 1992.9.27. 시복(교황 요한 바오로2세)
- 축일: 6.20.
- 예수회 고유 전례력 축일: 10.30.
도미닉 콜린즈는 수도생활을 위해 삶을 포기했지만, 영국의 압제에서 자유를 찾기 위한 아일랜드 군의 군종 사제로서 동반하다 처형을 당했다. 콜린즈는 1566년경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 아래에 있는 코크 지역 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6년 전 아일랜드 의회는 영국 성공회를 아일랜드의 국교로 지정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욜에서 완전히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젊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허락된 일자리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이로 인해 젊은 콜린즈는 일자리를 찾아 아일랜드를 떠나서 프랑스로 가게 되었다. 그는 브르타뉴 지방의 위그노(칼뱅주의 개신교 세력)와 맞서 싸우고 있는 메르쾨르 공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가톨릭 연맹의 대의 아래에서 9년 동안 탁월하게 활약했고, 그 활약에 맞게 진급도 할 수 있었다. 그의 활약이 가장 돋보인 순간은 전략적 가치가 높은 성을 탈환하였을 때인데, 이때 그는 해당 지역의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콜린즈에게 연금도 주고, 스페인의 비스케이만의 라 코루냐의 주둔군으로 복무하기도 하였지만, 콜린즈는 시간이 지날수록 군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1598년 사순에 그는 토마스 화이트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예수회 사제를 만났고, 더욱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하면서 살고자 하는 갈망을 화이트에게 말했다. 결국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도자로서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장상들은 처음에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였는데, 전장에 익숙한 군인인 그가 수도생활을 잘 할 수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관구장에게 입회를 허락해줄 것을 청하였고, 마침내 스페인 북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수련원에 입회하였다.
콜린즈는 수도생활에서 평화와 고요함을 찾고자 하였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그가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예수회 대학은 전염병이 창궐하였다. 공동체에서 7명의 형제들은 이미 감염되었고, 많은 형제들은 무시무시한 병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곳을 달아나기도 하였다. 그는 두달간 그곳에 머물면서 환자들을 돌보았고, 그의 간호 덕에 몇몇은 건강을 되찾기도 하였다. 또한 병으로 인해 선종한 다른 이들도 그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콜린즈의 돌봄을 통해 위로 속에서 보낼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그는 자신의 성소를 증명하고, 더 이상의 의구심에 찬 눈빛 없이 그의 수련을 마칠 수 있었다. 그의 장상들이 로마로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바른 판단력과 강인한 체력을 가졌으며, 성숙함과 지혜, 그리고 사교성을 지니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성급함과 완고함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얼스터에서 오닐과 오도널은 영국 왕실에 대항하였고, 아일랜드 전역이 봉기할 수 있도록 시도하는 중이었다. 1601년 펠리페 3세 스페인 국왕은 아일랜드 반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콜린즈와 만난적이 없음에도 그를 자신의 동반자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제임스 아쳐 신부와 같은 아일랜드 예수회원을 포함한 사제단이 그들과 함께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폭풍을 만나 서로 다른 배를 타고 항해하였다. 콜린즈의 배는 아일랜드에 도착하지 못하고 라 코루냐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마침내 1601년 12월 1일 그의 고향 킨세일과 30마일 거리밖에 되지 않는 캐슬헤이븐에 도착했으며, 그곳에는 이미 스페인의 주력 함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도시 밖으로는 마운트조이 휘하의 대규모 영국군이 마을을 포위하고 있었다.
아일랜드 군은 남북에서 킨세일로 집결하였다. 이때, 지휘관은 코크 서부에서 온 휴 오닐, 레드 휴 오도널, 그리고 오설리반 비애라였다. 아일랜드 군은 외부에서 영국군을 포위하고, 스페인 군은 마을 내부에서 영국군과 맞서고 있었다. 성탄 전야의 동이 틀 무렵 아일랜드 군은 공격을 시작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들로 마을 내부에 있는 스페인 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였고, 결국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다.
오닐과 오도널의 아일랜드 군은 북쪽으로 흩어졌고, 오설리반 비애라는 사람들을 이끌고 비애라 반도로 돌아갔다. 콜린즈는 퇴각에 동행했다. 몇 달 후 그는 던보이 성에서 143명의 군인들과 함께 영국군에 포위되었다. 수도자로서 콜린즈는 전투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격렬한 포위 공격 끝에, 성을 지키던 이들은 항복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칼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콜린즈는 6월 17일 심문을 받기 위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갔다. 영국군은 야만적인 고문을 했으며, 콜린즈가 가톨릭 신앙을 버린다면 엄청난 보상을 준다며 회유하기도 하였다. 그의 가족들도 그를 찾아와 개종하는 척 하라며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굳건히 버텨냈다.
1602년 10월 31일, 콜린즈는 처형을 위해 욜로 옮겨졌다. 단두대로 올라가기 전, 그는 아일랜드어와 영어로 그의 신앙을 지킨 채 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군중들에게 말했다. 한 장교는 그의 쾌활한 모습을 보면서 “연회에 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는 죽음을 갈망하는 것 같다.”라고 표현했다. 콜린즈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러한 이유로 죽음을 맞는다면 나는 수천번도 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다.”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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