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장 니콜라 코르디에 사제 순교자[예수회 고유전례력(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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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장 니콜라 코르디에 사제 순교자(Blessed John Nicholas Cordier, 1710-1794)
[예수회 고유전례력 - 복자 야고보 본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복자 요셉 앵베르와 복자 장 니콜라 코드디에 사제 순교자, 복자 토마스 시타르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복자 요한 파우스티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9.2.)]
- 1995.10.1. 시복(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 니콜라 코르디에는 프랑스 혁명에서 살아남았지만, 프랑스 공포정치 기간 거센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로렌 공국의 수이 출신인 그는 1728년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디종, 오세르, 오툉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전까지 철학을 공부하였다. 신학 공부를 마친 후, 박사학위를 받고, 스트라스부르에서 철학을, 퐁타무송에서는 신학을 가르쳤다. 그 후 그는 생미옐의 예수회 공동체의 장상으로서 봉사하였다. 생미옐은 예수회 활동을 금지당한 이후에도 코르디에가 수녀원에서 사제로서 사도직 활동을 하기 위해 계속해서 남아있던 곳이기도 하다.
1790년 프랑스 정부는 모든 수도회 활동을 금지하였고, 코르디에는 얼마간 정부의 박해를 피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1793년 10월 28일 고령으로 체포된 그는 추방령을 선고받았다. 아프리카로 추방하기 위해 로슈포르로 다른 사제들과 함께 이송되기 전까지 그는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6월 19일, 노령의 사제 코르디에는 노예선으로 쓰였던 워싱턴호에 태워졌다. 이 배는 항해를 하지는 못했는데,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안을 완벽히 봉쇄하였기 때문이다.
추방을 선고받은 수많은 인사들은 비위생적인 갑판 아래의 끔찍한 환경 속에서 고통받았다. 낮에는 갑판 위로 올라올 수 있었는데, 그런데도 공간이 너무 한정적이라 서로에게 온몸이 부대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서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하루 한 끼 제공되는 식사는 삶은 콩, 썩거나 벌레가 가득한 빵이 전부였는데, 이마저도 충분치 않은 양만 제공되었다. 그 때문에 호흡기 질환, 괴혈병, 발진티푸스 등의 질병이 만연했다. 매일 밤, 수많은 사제가 죽어 나갔고, 한여름의 무더위 탓에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만 갔다. 결국, 그들을 싣고 있던 그 배는 강의 하류로 옮겨갔고, 그곳의 한 섬에 임시 병원을 세워야만 했다. 코르디에가 병을 얻었을 때,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그 병원 역시 수감자 운송선을 개조한 시설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선종하여 254명의 희생자 중 한 명으로서 함께 모래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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