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을 이끄는 힘. 석요섭 신부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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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 산자락 위 <만레사 영성의 집>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전화기 신호가 꺼진다.

당황하는 사이 눈 앞에는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진다.

 

산세를 따라 펼쳐진 갖가지 밭과 과일 나무들 틈으로 석요섭 신부가 나타난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몸놀림은 흔한 농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지만 선한 미소와 옹골진 눈빛에서 그의 영적 깊이가 드러난다.

 

올 해로 7년 째, 허허벌판이던 땅을 홀로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가꾸었다.

수확의 기쁨도, 포기와 기다림의 지혜도 땅 위에서 몸으로 느끼며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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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께서는 언제부터 사제의 꿈을 갖고 계셨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고민을 열살 때부터 시작했을 정도니까요. 그런 제 안에 성소의 씨앗이 심어진 하나의 사건은 중3 때, 본당 신부님께서 사고로 돌아가신 일이었습니다. 온화한 분이셨어요. 어린 저희들이 아무리 짖궂은 장난을 쳐도 늘 웃으며 받아주시곤 했지요. 마음 깊이 생각하던 분이 돌아가신 뒤 제 안에 사제로서 사는 삶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사제로 사는 것도 꽤 괜찮겠다. 사람들에게 푸근한 품이 되고 기억에 남는 삶이겠다 싶었지요. 고3 때, 고민을 거듭하다 신학교에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시기를 놓쳐 본당 신부님 추천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신학교 진학을 포기하게 되었지요.

 

 

그 때 곧바로 성소의 길을 포기하셨어요?

 

그렇죠. 그저 내 길이 아니구나 했습니다. 전자공학과로 진학하여 대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워낙 학생 시위가 강성하던 때라 1,2학년 내내 정신 없이 지내다가 겨우 졸업을 하고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신기술을 도입하고 공장을 자동화하는 일을 했는데 새벽 3시에 일어나 출근해서 꼬박 일하고 회사 기숙사에 돌아오면 밤 11시였습니다. 바빴지만 불만 없이 회사생활을 했었죠. 일하는 만큼 돈도 많이 벌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제 책상 위로 햇볕이 가득 드리웠습니다. 고요한 사무실 책상 위에 비친 한 줄기 햇빛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난 것이 없었는데, 제 마음엔 불현듯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어릴 적 성소를 꿈꿨던 일도 생각이 났지요. 그날, 내 삶을 돌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일 먼저 꼰벤뚜알 피정에 갔는데 가자마자 대뜸 입회를 권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워 주춤하고 다른 수도원 피정을 알아봤습니다. 그러다가 예수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회를 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시작이 좋았죠. 편하게 기도모임 같은 것으로 시작했으니까요. 그 곳에서 만난 신부님께서 피정에 와보겠냐고 초대하시어 갔더니 성소 식별 피정이었습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어느새 수사님이 주시는 기도요점이나 신부님의 면담 안에서 깊은 위로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담당 신부님의 입회 권유를 듣자 또다시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신학교 입학을 못했던 기억 때문이었죠. 입회 신청을 했는데 거부당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섰습니다. 결국 그런 마음을 신부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또 다시 실패 체험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 삶의 양식을 바꾸고 싶은 어떤 열망은 있습니다. 제가 입회할 수 있다는 확답을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인터뷰에 응하겠습니다.” 당돌했었죠. 그렇지만 두려움과 나약함이 가로막는 저의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 보시기 흐뭇할까 고민해온 흔적들을 고스란히 내놓으니 저에게 예수회 입회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양성 과정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실습기에요. 저는 워낙 감정 폭이 크지 않은 사람입니다. 누가 뭘 시켜도 그대로 성실히 임하는 편이었고 조용히 제 성찰하고 눈에 띄지 않게 있는 성향이라 수련원에서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수련원장 신부님도 제게 물어보셨어요. 원래 그렇게 차분하냐고요. 그러다가 실습기 쯤 되자 무슨 일을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구체적이고 특별한 지향이 없었거든요. 어느 날 오인돈 신부가 제게 캄보디아에 가보자고 꼬시더라고요. 캄보디아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봤습니다. 짧은 방문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양성 신부님께 캄보디아로 실습을 보내달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보내기로 한 사람이 있다고 밀려나버렸지요. 속상했지만 크게 낙담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격이 그랬어요. 결국 실습기에 파견된 곳은 후원회였습니다.

 

처음 들은 요청은 후원회에 후원자 관리 시스템이 없으니 그것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는데, 막상 후원회에서 일하고 계신 신부님들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보다는 당장 쌓여있는 후원회 행사들을 위해 운전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많이 상했죠. 6개월 간 내리 운전만 하다 지쳐 지구장신부님께 하소연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후원회 시스템 정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일 운전만 한다고 느꼈던 6개월이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난 시절이더라고요. 그 안에서 한국 교회 신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영적 목마름이었습니다. 일개 실습기 수사일 뿐인 저를 붙잡고 간절한 기도를 말씀하시는 분들, 삶의 자리에서 저마다 터져 나오는 영적 고민들을 마주하니 예수님께서 저를 이 자리로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사람을 만나라고 한 것이구나. 실은 제가 정말 불평을 많이 했거든요. 운전만 시킬거면서 나를 왜 불렀나. 나는 왜 여기 있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빈정대던 시간 안에서 의외로 가장 중요한 것을 얻은 셈이지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 그러기 위해 더욱더 기도를 하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더 헤아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신학기에 공부를 할 동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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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홍천에 와서 농사를 지으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사실 내 백그라운드가 확실할 수록 내 틀 안에서 보는 것 밖에 없어져요. 내 일, 내 상황 안에 파묻히는거지요. 꽤 오랜 시간 관구 재무 일을 맡았어요. 원치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 나에게 맡겨졌겠지 생각하고 맡았어요. 그래도 그 때 장상 신부님께 그 말은 했어요. “신부님, 행정이나 사무 보는 거 저한테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맡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제가 어려워하는 일을 해야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신다면 하겠습니다.” 결국 그 일을 맡았죠. 한창 젊은 시기에 관구 본부에서 있다보니 몰라도 되는 걸 일찍 알게 되더라고요. 전체적인 것을 보게 되고 문제의식이 생기고, 형제들에 대한 선입견도 생기고 그렇게 쉽게 판단하게 되는 자신을 보는게 힘들어졌어요. 그래도 버텼어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성실함만큼은 자신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저의 그 마음마저도 타인들은 쉽게 판단해버리는 걸 느끼면서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아주 존경하던 형제들도 미워지기도 하고, 쉽게 마음 상하기 시작했어요. 바닥을 치는 체험이었죠. 2013년 6월 3일, 안식년을 받자마자 곧장 짐 싸들고 설악산에 홀로 들어가버렸어요. 제대로 방황했습니다. 여주로 옮겨서 어느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서 5개월 지내고, 강화로 옮겨 방을 얻어 그냥 살기도 했어요. 그러던 중 류해욱 신부님께서 쓰러지시고 관구에서 연락이 왔어요. 류신부님이 하시던 일을 이어서 해줄 수 있냐고요. 그 일이 홍천의 영성 센터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집 짓고 센터 기반 닦는 일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 땐 그게 그렇게 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청했죠.

 

 

“저는 거기 가서 센터 말고 노동을 하고 싶습니다.”

 

 

홍천에 들어와서 바로 지금의 센터를 지은 건 아니에요. 10개월 간 농사부터 지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처음엔 기도원 짓는 줄 알고 민원 넣을 생각을 했대요. 농사 짓는 걸 보시고도 모두들 “서울에서 온 신부가 무슨 농사냐.” 혀를 끌끌 차셨죠. 그래도 매일 새벽부터 도시락을 싸서 다니며 텅 빈 땅에 농사를 지었어요. 그 땅이 워낙 황무지라 매일 같이 씨 뿌리고 돌봐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더라고요. 그래도 그저 몸을 움직이자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지식, 소리로 일하지 말자. 이 세상엔 앎도 많고, 배운 사람도, 말하는 이들도 많지 않나. 직접 움직이고 몸으로 실천하자.” 스스로 되뇌었어요. 사실 이 곳에 와서 일하는 것은 농사가 목적이 아니에요. 농사를 통해 노동을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최대한 직접 몸을 움직여가며 먹고 살려고 집도 패시브하우스로 에너지를 최소화한 집을 지었어요. 농사도 화학 비료나 기계가 아닌 내 몸을 써서 짓는 농사로 하고요. 제가 여기에서 일하는 것을 보며 많은 분들이 다른 수도회나 가톨릭 단체들에서 하는 생태 운동, 농촌 운동으로 이해하시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저 몸을 움직이며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 안에 하느님께서 일을 하시더라고요.

 

 

신부님께서 직접 몸을 움직여 농사를 짓다는 말씀이  참으로 영성적으로 들립니다.

 

뭐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 땅이 만 평 가까이 되어요. 처음 밭갈이를 이틀 꼬박 트랙터로 해도 절반 밖에 못했을 만큼 넓은 땅입니다. 그래도 농사를 짓다보면 분명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있어요. 첫 해에 먼저 옥수수를 심었어요. 그 해엔 너무 가물어서 땅을 삽으로 퍼내면 먼지만 풀풀 나곤 했지요. 옥수수를 심어놓고 몇날 며칠을 돌보아도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좌절하고 불안해하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날이 이어졌지요. 어느날 별 기대 없이 새벽에 밭에 오르는데 멀리서 동이 터오르는 아래 희미하게 파란 빛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옥수수 씨앗이 작게 싹을 틔워 나란히 푸른 줄을 지어 있는 아주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불과 어제만 해도 황무지였던 땅에 푸른 생명이 돋아나 살아있는 것을 보니 마음 속에 아주 뜨거운 것이 올라왔습니다. 이게 생명이구나. 내게 주시겠다 하신 하느님 생명이 바로 이거구나. 그 땅을 가만히 만지고 앉아서 한 동안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 땅에 하느님 생명이 그대로 있고 나는 그 분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함께 나누어 받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렇게 이 곳에 있게 된 것이 올 해로 7년째 되었네요. 그 간 안 해 본 작물이 거의 없다 싶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키워냈습니다. 옥수수, 배추, 오미자, 콩, 들깨 등 주로 신자분들과 직접 만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작물을 하려고 해요. 일반적으로 농민들이 하지 않는 돈 안되는 작물을 짓더라도 그게 신자분들에게 직접 다가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제게는 더욱 큰 이득이지요. 이 곳에서 난 작물로 직접 고추장, 메주, 들기름을 만들어 나누기도 하고 그 안에 담긴 생명을 전달하고, 그걸 받아든 채 기뻐하는 분들을 보면 참 기분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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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산다는게 별 게 없어요. 저는 젊은이들이 조금은 더 자신있게 살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말이지요. 공부를 해도, 막노동을 해도, 춤추고, 그림을 그려도 늘 자신 있게 하길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늘 다른 시선에 싸여 있는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생각해보면 저 역시 그랬던 적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있게 산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내 처지가 어떻든 나 스스로 움직이는 실제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적인 삶이란 곧, 내가 공부하고 살아가는 자리, 회사 생활을 하는 자리, 수도생활 하는 자리에서 어디든지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일상 안에서 늘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맛보고 쇄신하는 것이지요.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은 내 계획이 아닌 곳에서, 내가 의도치 않을 때, 내가 원치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 같아요. 다만 중요한건 그런 순간들도 결국 내가 움직여야만 온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