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용서가 없다면 평화도 없다고 – 김성환 S.J.

성소실
2021.03.16 10:46 262 0

본문

 괴산에서 강정으로, 

분쟁의 한 가운데에서

 평화를 연구하는 자리로 

 

이 사제는 어찌하여 이토록 지독하게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일까.

 

다만 알 수 있는 건 

그 시작과 끝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평화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5.8.15 강정미사 봉헌.jpg 


신부님께서는 어떻게 사제의 길을 택하게 되셨습니까?

1985년 봄, 학내에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나의 친구들은 저토록 고생하며 투쟁하는데, 나 자신을 위한 공부가 옳은 일인가?” 뒤늦게 시위에 참여했고, 4학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시위 행렬에서 제 눈에 띈 것은 신부님들의 용감한 모습이었습니다. 겁 많은 저의 모습과 용기 있는 신부님들의 모습이 대비되었습니다.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올까?” 천주교 사제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어 대학 근처 성당에서 교리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교리를 배우며 의심이 올라왔습니다. “왜 신부가 되고 싶지?”, “인생은 왜 살아야 하지?” 삶의 근본적 물음을 던지며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도 삶의 목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우울함이 길어지며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을 때, 문득 이런 대답이 들렸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제게 교리를 가르쳐 주신 수녀님께서 ‘영혼을 구하는 성직자의 길’을 말하셨습니다. ‘영혼을 구하는’이란 말이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다시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제지망으로 입회하신 뒤 평수사로 그리고 다시 최종적으로 사제의 길로 선택을 바꾸셨습니다. 이토록 이례적인 여정을 걸어오신 배경은 무엇일까요?

저는 사제 지망으로 예수회에 입회했습니다. 그런데 수련기 30일 피정 중에 평수사로서 살고 싶다는 원의가 생겼습니다. 이러한 바람은 계속되었고, 평수사의 삶이 보다 더 큰 겸손으로 이끌어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 2년 동안 평수사로서 철학 과정을 밟는 동안, 저의 생각은 다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제로서의 삶이 하느님께 더 영광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되어서, 양성담당 신부님께 “하느님이 이런 길로 불렀다가 저런 길로 부르기도 하는 지그재그 하느님일 수 있습니까?”라고 말씀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철학 공부를 끝내고, 농촌사도직 체험을 한 괴산에서의 1년 동안의 삶이 마무리되어 갈 때에, 총장 신부님께서는 저에게 신학공부를 하면서 더 식별을 해보도록 초대했습니다. 마침내 신학 2년차 때, 총장신부님께서는 저의 사제지망자로서의 회귀를 최종적으로 허락했습니다. 이런 식별과정에서, 저는 예수회가 성소를 식별을 도와주는데, 얼마나 유연함과 관대함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식별 초기에는, 하느님은 지 그재그 하느님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하느님은 지그재그 하느님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섭리의 묘함을 깨달았다고 할까요!

 

해군기지 사업단 정문 막고 미사 참례.jpg

 

신부님은 사회 사도직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셨습니다. 괴산, 강정 등에서 특히 많은 활동을 하셨지요. 그 안에서의 하느님 체험에 대해 나누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2001년 서품 후, 괴산에서 농촌 사도직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 하나가 농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몸과 자연을 살리는 생명 농업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괴산에는 생명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 가톨릭 신자도 있었지요. 서품 몇 해 전, 괴산에서 머물렀던 1년 경험도 저를 이곳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농민들과 함께 지내며 나눔의 삶과 대자연이 주는 치유와 자유를 체험했던 영향이 컸습니다. 괴산 농민들은 가난했지만 지역 어린이, 노인, 해외 가난한 사람들까지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생계만 추구하지 않고 잘못된 농업 정책을 비판하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함께 잘사는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른 이들을 돕는 농민들의 모습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괴산의 산과 강, 태양과 별과 달, 하늘과 새들, 맑은 공기와 꽃과 곤충 등. 수없이 많은 피조물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 이냐시오를 비롯한 많은 성인들이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10년을 살다가 2011년, 제주 강정에 갔습니다. 여러 계기가 있지만 저의 석사 논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논문 주제가 ‘한반도 통일 신학’과 관련 있어서 평화와 통일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제주해군기지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장애가 되겠다는 인식이 들었지요. 예수회원으로는 처음으로 강정에 몇 주 동안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뒤 짬이 나는 대로, 괴산에서는 농촌사도직 일을 하고 예수회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강정에 드나들었습니다. 2012년 관구장 신부님께서 저를 강정 디딤돌공동체에 파견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강정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평화와 생태를 위해 싸우고자 발걸음을 합니다. 강정의 활동은 이들에게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평화를 위해서 그들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도 많지만 비신자도 많습니다. 저는 그러한 젊은이들을 통해 선하신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느끼고 발견합니다. 해군기지 반대를 위한 행동들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오직 미사만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함께 했고, 함께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사중 공사장 정문앞 막고서.jpg

 

신부님께서는 아일랜드에서 “평화학”을 공부하고 오셨습니다. 평화학을 공부하게 된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평화학을 공부했습니다. 우선, 강정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일하기 위해 평화학 연구가 필요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평화센터는 강우일 주교님, 문정현 신부님, 신자들, 교회 밖 평화 애호가들의 염원과 도움으로 설립되었고, 센터 정신에 맞는 생명과 평화 운동의 체계적인 준비가 요구되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4년 동안 강정에서 해 온 평화 운동을 학문적으로 성찰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평화 운동을 실현하고 싶었습니다.

 

평화학의 무엇이 한국 사회와 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1945년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과 이론은 ‘국가 안보’였습니다. 이는 많은 부분 개인의 삶과 인권을 후방에 둡니다. 국가 안보라는 명목 아래에서는 생태계도, 마을의 공동체성도, 평화와 일상도 아주 쉽게 희생되지요. 이제는 개인의 삶과 인권을 중시하는 ‘인간 안보’ 이론이 대두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1700여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국가 안보’를 지지한 이론적 근거 중 하나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정립한 ‘정당한 전쟁’이었습니다. 특정한 조건들 속에서 방어적인 차원에서 전쟁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류역사에서 ‘정당한 전쟁’이 펼쳐진 예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당한 전쟁’ 이론이 수많은 부당한 전쟁을 합리화시켜주었을 뿐이었지요.

오랜 시간 교회는 ‘정의’의 결과로써 ‘평화’가 온다고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적절한 보상이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이런 경우에 정의의 결과로서 평화가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평화는 쉽지 않습니다. 힘이 강한 국가나 민족이 약한 국가나 민족을 탄압하고 피해를 주는 역사적 사례가 많습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고 평화도 달성되기도 힘듭니다.

개인적으로 평화는 “용서”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진부하게 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가르쳐 주셨지만, 용서는 쉬운 일은 아니지요. 정의 없이 평화가 없습니다. 동시에 용서 없이 평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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