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젊은이를 만나는가? 이헌준 S.J.
본문
“왜 세례를 받고 싶으신가요?”
연학 수사 시절, 대학 교목처 교리반 학생들과의 첫만남, 저는 이 질문과 함께 교리반의 문을 열었습니다. 학부생 새내기부터 대학원생, 사회초년생으로 구성된 예비자들의 대답은 참 다양했습니다.
“바쁜 대학생활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요.”
“여자친구가 세례를 받아야만 결혼을 허락해준다고 해서요.”
생기 가득한 표정,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제각기 진지하게 대답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저의 눈에 사랑스럽게 담겼습니다. 이들과 함께 할 1년이 기대되고 설렜습니다. 하지만 잔뜩 부풀었던 기대감이 실망과 허탈감으로 바뀌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과제와 시험, 각종 모임들과 과 행사, 취업 준비를 위한 활동들로 가득 채워진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학생들에게 교리반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났고, 교리수업에 결석을 하는 학생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당시 저는 결석한 학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며 다음 모임 때는 꼭 보자며 격려해주고, 메일로는 그 주간의 교리 내용을 보내주면서 점점 사그라지는 그들의 열정에 불을 지피려 애를 썼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리반을 이탈하는 학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사님, 저 사정이 있어 교리반 더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메일에 짤막하게 남긴 문장 하나를 보고 있을 때는 기운이 빠지면서 정말 그냥 다 관두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 왔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활동들이 그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꼴처럼 바보스럽게 비춰졌습니다. 조금씩 시들해지는 의욕을 추스르며 교리 수업을 이어가던 중, 어느 날 공동체로 전화가 하나 걸려왔습니다. 교리반을 중도에 포기했던 학생이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 되었는데 수사님이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기에게 관심 가져주고, 전화 걸어 주고, 메일로 교리 내용 보내주면서 늘 마지막에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잘 지내라 건네준 말이 학교 생활하는데 큰 위안이 되었다고, 너무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짧은 통화는 저에게 남은 기간 동안 교리 수업을 이어가게 해주는 큰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그 독을 넓은 호 수 속에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을 내 마음이라는 호수에 던져 넣자는 심정으로 남은 학생들을 데리고 교리 수업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년 간의 교리반은 세례식과 함께 매듭을 짓게 되었습니다. 세례식이 끝나고 몇 주 후에 교리반 학생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 학생이 말을 꺼냈습니다.
“수사님, 사실 제가 교리를 아주 잘 배운것 같지는 않아요. 지금도 성당에 가면 모르는 것 투성이구요. 근데 1년 동안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그 마음을 따라 살고 싶어 작은 자선단체에 후원도 하기 시작했네요”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후, 페이스북을 돌아다니던 중, 저는 한 컷의 사진을 한 참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사진 안에는 문제의 전화를 했던 그 학생의 세례식 장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연히 시작한 교리반을 통해 제 안에는 청년세대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겪는 아픔과 어려움을 곁에서 바라보면서 어떻게 동행하고 사랑해야 하는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젊은이들을 무한히 신뢰하고 기다려주면서 곁에서 머물고 싶다. 필요할 땐 언제든 쉬어갈 수 있는 둥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시작으로 서품을 받고 나서 청년을 위한 사도직에 몸 담게 되었고, 지금도 대부분의 시간을 젊은이들과 보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청년들의 삶은 고단하고 그 옆에선 밑빠진 독처럼 공허한 순간이 자주 찾아오곤 하지만 오늘도 마음의 호수에 내가 만나는 청년들을 던져 놓습니다. 콩나무 시루에 물을 붓듯이 내가 쏟아붓는 사랑과 관심들로 함께 성장하고 변화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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