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앵베르 사제 순교자[예수회 고유전례력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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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요셉 앵베르 사제 순교자(Blessed Joseph Imbert, 1720-1794)
[예수회 고유전례력 - 복자 야고보 본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복자 요셉 앵베르와 복자 장 니콜라 코드디에 사제 순교자, 복자 토마스 시타르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복자 요한 파우스티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9.2.)]
- 1995.10.1. 시복(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본당 사제로서 활동했던 요셉 앵베르는 프랑스 혁명 세력에 의해 아프리카로 국외 추방되는 사제들을 싣는 노예선에서 출항하지 못한 채 선종하였다. 앵베르는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태어났고, 아비뇽의 수련원으로 입회하였다. 그는 서품받고 세 곳의 예수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예수회가 박해받던 1762년에는 그르노블에 있었다. 이후 그는 물랭 교구에 합류했지만, 1790년 성직자 공민 헌장(프랑스 교회는 교황과 무관하게 국민의회에 의해 설립되어야 하며 성직자들은 행정관이나 사법관들처럼 시민들에게서 선출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거부함으로써 그의 사목 활동을 포기하도록 압박받았다. 그는 프랑스를 벗어나 일신의 안전을 추구하기보다, 프랑스에 남아 비밀리에 사도직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주교가 추방된 후에 대목구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 지역의 최고위 성직자가 된 그는 프랑스 공포정치의 표적이 되어 1793년 체포되었다.
이듬해 초, 그와 24명의 교구 사제들을 아프리카로 추방하기 위한 죄수선을 타도록 이송되었다. 로슈포르에 도착한 사제들은 이전에 수도원으로 쓰였던 병원과 샤랑트강에 정박하여 진료소로 쓰이던 두 척의 작은 배에 감금되었다. 4월 13일 앵베르는 강어귀에 요새화된 섬에 정박한 듀스-아소시에스라는 배로 옮겨졌다. 70대 예수회원이었던 앵베르가 배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고, 그와 다른 수감자들은 묵주기도, 성무일도, 그 밖의 신심 활동을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5월 초, 노예선으로 설계된 그 배에는 400명이 넘는 사제들이 낮은 갑판 가득 태워졌고, 선장은 더 이상의 수감자를 수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사제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좁은 공간에 똑바로 서 있기도 어려웠고, 매일 갑판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허락된 짧은 시간 동안에도 잠시나마 앉을 수 있는 공간 역시 부족하였다. 많은 수감자는 상한 음식과 불결한 위생 상태 때문에, 병에 걸리기 시작하였다. 앵베르는 배에 수감될 때부터 이미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에 가장 먼저 병에 걸렸고, 발진티푸스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두 달 남짓 수감생활을 하다 선종하였다. 그는 다른 226명의 박해받은 사제들과 함께 인근 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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